타협

작성자
표재근
작성일
2021-10-22 21:34
조회
812
세상과의 좋은 관계를 형성할 때, 우리는 아름다운 삶의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세상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타협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구하는 부정적인 측면의 타협은 버려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타협은 신앙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기독교 현실주의를 통해 세상 가운데서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명확하게 규명하며, 기독교의 윤리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을,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용기를 갖고 과감하게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삶은 타협을 통해 적절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막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일을 쉬고 경건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 말씀을 묵상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세세한 규칙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규칙들이 존재했습니다.

어느 안식일 날,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던 제자들이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당시 안식일에 대한 계명들을 철저히 지키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계명을 어겼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팠던 다윗이 했던 일을 예로 들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수많은 계명들을 만들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의를 삼던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의 형식이 아닌, 안식일의 본질을 지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현대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식에 얽매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참된 삶의 소망과 기쁨을 누리는 날입니다. 세상의 번잡함에서 물러나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주일을 지키려 애를 씁니다. 예배에 참석만 하면 주일을 지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주일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칠수록 우리의 삶은 유연해집니다. 더 올바른 삶,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는 만큼, 더 유연하고 더 관대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판과 정죄를 앞세웁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자신의 양은 구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고통에 시달려온 병자를 고치는 것은 안식일에 일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송사합니다. 밀 이삭을 잘라먹을 수밖에 없는 배고픔에 도움을 베풀기보다는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비방합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과 다름없는 이중적인 신앙의 잣대를 갖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상황에서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로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하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믿지 않는 많은 가정들이 명절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말씀을 핑계로 아예 명절날 부모님께 찾아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찾아갔다할지라도 거룩하지 않은 것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움직이기 싫고 섬기기 싫어하는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올바른 신앙적인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스스로 낮아져서 먼저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가서 열심히 봉사할 것입니다. 제사는 드리지 않지만 믿지 않는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할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다면, 믿지 않는 자들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들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막 3: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송사하려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겠지만, 안식일의 형식에만 머무는 자들은 선을 행하거나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키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다툼과 분쟁을 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반복할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잣대로 사용합니다. 또한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일한 문제로 지적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 많은 물질을 투자하지만 가족, 또는 이웃을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 약간의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힘들어합니다. 부모의 무관심과 고집, 감정의 기복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신앙의 본질을 되찾을 때,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을 누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전 8: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는 자가 아니라, 끝없이 배워가야 하는 자이고,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적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우리의 입이 아닌 삶이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삶이 올바른 삶인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고, 돌이키게 됩니다.

전쟁으로 혼란한 시기, 기독교적 가치관이 무너져가는 독일교회를 올바로 세운 디트리히트 본회퍼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칙이란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버리는 도구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일정한 원칙들이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원칙들을 사용한다면, 원칙은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것이 도구입니다. 다시 말하여 굳어진 우리의 신앙관들을 억지로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감동된 영혼의 순수한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연약한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 헐벗고 굶주린 형제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우리의 삶이 움직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켜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언제든지 자신의 원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는 질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타협입니다.

세상과의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관을 깨뜨리고,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타협을 할 때, 우리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회복이 일어나게 되고, 아름다운 삶의 변화들이 주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