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과 제한

작성자
표재근
작성일
2023-07-25 11:06
조회
246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근본적인 사고는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의 저울질 속에 있다. 이러한 저울질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토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시고, 말씀하시고 소망을 주시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겠느냐, 움직이겠느냐이다. 이처럼 신앙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의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

카오스이론은 북경에서 한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캘리포니아에 커다란 해일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들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킴을 의미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한계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주어진 삶이 열악하고 다가오는 환경이 힘들지라도 이겨보겠노라 결심하고 밀고 나가게 되면, 그 작은 움직임들이 우리의 삶에 점차적인 영향을 미쳐 큰 변화를 이루게 된다.

좌절과 낙망의 상황에 부딪칠 때, 하나님께서는 현실에 우리의 소망을 맞추시지 않는다. 오히려 현 상황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커다란 소망과 비전을 주신다. 이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모하고 미친 짓이라 우려하며 말릴지라도 그 소망을 붙잡고 삶을 움직여나간다.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고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리고 그 움직임들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가 속한 가정과 사회, 나아가 세계 곳곳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부유하고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최고의 스승 밑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운 뛰어난 학자였다. 이처럼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바울이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영적인 죽음이었다. 육적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이 채워져 있을지라도 영적으로 부패해 있고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자신의 한계였다.

동시에 바울은 그러한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신의 육적인 삶을 못 박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것을 결단했다.

영적인 삶의 변화는 육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반항기의 청소년들이 변화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되면, 이제껏 보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잔소리하고 짜증내던 엄마의 모습에서 넘치는 사랑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에서 지치고 힘든 가장의 모습을 발견하고 힘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학업에 매진하거나 죽을 만큼 힘들게 느껴지던 환경에 담대히 부딪쳐 나가게 된다. 이처럼 영적인 삶은 육적인 삶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크고 강력한 변화들을 이루어낸다.

변화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따져 나는 할 수 없다며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조건과 관계없이 내가 먼저 움직이고 내가 먼저 걸음을 떼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삶을 움직여나가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적당히 하는 안일함에 빠져 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 여기며 목숨 걸고 덤벼들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지만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오면 포기하고 체념해버린다. 한두 번 기도하다 포기하고, 한두 번 성경 읽다 포기하고, 한두 번 용서하고 품어주다가 포기해버린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한계의 벽은 높아지고 삶의 압박은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한계의 벽을 깨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이 오직 믿음 안에서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종교생활을 벗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단순히 주일이니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의 입술로 믿음의 고백을 드려야 하고, 그 말씀에 따라 우리의 삶을 움직여가야 한다. 매일 매일 기도하는 삶,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도적이 있는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도적이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삶은 도적질 당하고 죽임 당하며 멸망당하게 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삶은 생명이 살아나고 더욱 풍성해지게 된다.

젊은 시절 가난으로 인해 상처와 고통을 받은 한 사업가는 많은 부를 축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질에 집착했다. 그 집착은 정신병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여 밤에는 불을 켜지 않았고, 수도세나 전기세를 비롯한 관리비문제로 항상 부인과 다투었다. 자녀들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배우지 못했다. 이를 보다 못한 누나가 한 목회자와의 상담을 주선했고, 목회자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해 십일조를 할 것을 권면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더 이상 물질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사업가는 목회자의 권면을 받아들여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질에 대한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은 사라졌고 가정은 회복되었다.

이처럼 세상적인 가치관, 세상적인 삶의 방식은 도적과 같이 우리의 삶을 좌절시키고 무너뜨린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상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녀들 역시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신앙의 삶을 이끌어주고 기도로써 축복해야 한다. 또한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들을 자녀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육신의 피곤함이나 여러 가지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의 자녀 역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버티고 이겨내는 힘을 갖게 된다.

시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급박한 위기와 고통 속에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었고, 간절히 도움을 구하였다. 그리고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 오는 도움의 역사들을 경험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자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간절히 도움을 구하지만, 정작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거부한다.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지 않는다. 또한 인도의 과정에 주어지는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의 역사들을 제한한다.

고전 10:1-4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모세의 인도에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은 구름기둥 밑에서 한낮의 더위를 식혔고, 불기둥 밑에서 한밤의 추위를 견뎠다.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 앞에서 걸어서 홍해를 건넜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물을 마셨다. 이처럼 이스라엘백성 모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안에 사는 자는 많지 않았다. 믿음 안에 살지 못한 다수는 약속의 땅을 지척에 두고 광야에서 엎드러졌다.

인간은 무지하며 실수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누군가 잘못을 저지를 경우, 첫 번째 실수는 무지의 결과일 수 있기에 정확하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다시 반복할 때는 아직 습관이 되지 못했기에, 세 번째까지는 무의식중에 튀어나올 수 있기에 부드럽게 충고해야 한다. 그러나 네 번 이상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이며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따끔한 징계로서 다시는 실수하지 않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의지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길,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자 하는 믿음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 만일 믿음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면, 지난 날 느끼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의 역사들을 상고하여 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의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신앙은 결단이다. 방금 전까지 의심하였다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믿기로 결단해야 한다. 어제까지 죄악을 일삼아 행하였다할지라도 오늘 이 순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오늘 우리의 삶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시 78:8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이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78:10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완고하고 패역한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행하기를 거절한다. 말씀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배우고, 신앙의 공동체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배우지만, 그렇게 살고자 몸부림치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고집하며 세상적인 삶의 방식들을 고수한다. 기도해야할 것을 배우지만 기도하지 않는다. 말씀 묵상할 것을 배우지만 묵상하지 않는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가질 것을 배우지만, 함께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음주와 흡연을 멀리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할 것을 배우지만 따르지 않는다.

수 23: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가나안 땅에 들어와 많은 나라들과 싸워 이기고 어느 정도 평화가 찾아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었다. 그 땅에 만연했던 우상숭배와 악한 행위들을 본받아 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통분한 여호수아는 죽음이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간곡히 권면하였다.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해야 한다. 막연히 머물러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크게 힘쓰는 삶, 믿음 안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변화를 위한 움직임들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그러할 때, 점차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숙되고 이 성숙은 가족의 성숙, 직장의 성숙, 교회의 성숙, 나아가 사회와 민족의 성숙을 가져오는 시발점이 된다.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저울질하며 스스로의 한계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모든 상황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하겠느냐 안하겠느냐의 선택으로 본다. 그리고 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주어진 환경에 부딪쳐나간다.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고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친다.

영적인 삶의 변화는 육적인 삶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크고 강력한 역사들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적당히 하는 안일함에 빠져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으로 여기는 막연한 삶으로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 오직 믿음 안에서 살겠다는 결단과 강력한 의지로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를 거부하던 완고하고 패역한 마음들을 깨뜨려야 한다. 도적같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세상적인 가치관, 세상적인 삶의 방식들을 끊어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믿음 안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변화의 움직임들을 지속해나갈 때, 점차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숙된다. 또한 우리의 성숙은 가족의 성숙, 직장의 성숙, 교회의 성숙, 나아가 사회와 민족의 성숙을 가져오는 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