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만과 무지

작성자
표재근
작성일
2024-02-29 21:31
조회
67
한 아이가 자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한번 몸을 뒤척인 것이 그대로 떨어진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안에 깊숙이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삶을 움직여간다면, 우리는 세상의 유혹이나 시험에 빠질 염려가 없다. 그러나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삶, 항상 세상과의 경계선에 머무는 신앙으로는 쉽게 세상의 유혹에 빠져 무너지게 된다.

이처럼 위태로운 신앙의 근본적인 원인은 태만과 무지이다. 태만은 알고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고, 무지는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지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또는 이제 갓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우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태만함에 빠져있다.

예를 들어 예배는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뿐 아니라, 매일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다. 또한 공적인 예배는 예배 시간 전에 미리 나아와 기도로써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친밀함을 경험해야 한다. 이처럼 준비된 마음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주일날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그 한 번의 예배조차 제대로 드리지 않는다. 느지막히 나와 성의 없이 찬양하고 선포되는 말씀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태만함에 빠져 신앙의 형식만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자에게는 말씀이 살아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는 자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자는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 견딜 수 없다.

교육학자인 ‘허버트 스펜서’는 ‘교육의 최대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을 했다. 예를 들어 질병으로 인해 중대한 수술을 할 경우,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명성을 좌우하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지식적인 면에서는 모든 의사들이 비슷하다. 그러나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정확히 판단하고 완벽하게 수술하는 자들만이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을 얻게 된다.

신앙 역시 동일하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는 것은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켜나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는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주어지는 삶으로 준비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을 쌓는 것에만 만족할 뿐, 이러한 고통의 시간들을 견디기 싫어한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기도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태만한 삶을 지속한다.

왕하 2:1-14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7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살아있는 채로 하늘로 올리고자 하셨다. 제자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나오던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벧엘로 가고자 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는 그대로 길갈에 머물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엘리야의 영혼을 두고 맹세하며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노라 대답했다. 벧엘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 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리고로 이끄시니 엘리사에게 벧엘에 머물라고 했다. 이때에도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지 않았다. 또 다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요단으로 이끄실 때 역시, 엘리사는 떠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요단강 너머에 섰을 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다.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해야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붙들고 또 붙들었다.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마음에 깨달음이 주어질 때,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의 삶으로 서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그로 인해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온다면, 더욱 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열심과 열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말씀이 주어진다할지라도 이전과 다름없이 안일하게 주저앉아 있는 삶, 게으름을 피우는 삶, 부주의한 삶을 지속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변화도 어떠한 역사도 가져올 수 없다.

엘리사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고 묻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나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갑절의 영감을 받는 것은 엘리사의 믿음에 달려있음을 암시하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해버렸다. 슬픔에 잠긴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고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건너올 때,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 요단물을 치자 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이 나타났던 것처럼 자신도 엘리야의 겉옷을 들고 요단물을 쳤다. 그러자 물이 갈라지고 엘리사는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넜다.

갑절의 영감을 얻기 위해 엘리사가 했던 것은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스승 엘리야에게 집중한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얻었다. 동일하게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의 삶에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능력 있고 가장 힘 있는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붙들지 않는다. 삶의 어려움이 다가와도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이러다가 자신의 삶이 무너지겠다는 위기를 느끼지만, 곧 그 감동을 소멸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괜찮겠지 하는 태만한 신앙의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

엘리사가 구했던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은 엘리야와 동행하는 삶 가운데 이미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행하는 엘리야와 함께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엘리사 안에 강력한 믿음을 형성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강력한 영감이 없었다면 승천하려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동행의 힘이다. 그러나 동행하기 위해서는 태만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일정하게 지속되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꾸준히 신앙이 성장할 뿐 아니라, 변화된 삶을 통해 수많은 역사들을 이루어내게 된다.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광야 40년의 세월동안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낮에는 장막 위에 있는 여호와의 구름을 보았고, 밤에는 그 구름 가운데 있는 불을 보았다.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낮에는 구름으로 더위를 식히시고, 밤에는 불로 추위를 막아주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다. 이 땅을 떠나 천국 가는 그날까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 한다. 우리가 소망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은 잃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세상에서 잃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얻는 것이 있다. 지금 당장은 손해인 듯 보일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축복이 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 축복을 경험할 때까지 삶을 적극적으로 움직여가야 한다. 더 이상 남의 일인 것처럼 방관하거나 안일한 삶에 자신을 방치하지 말고 부딪쳐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잘 것 없는 일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로 인해 삶이 계속적으로 막히고 엉켜 결국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삶에서 불필요한 일들을 버리게 된다. 이로 인해 삶이 소망으로 가득하게 되고, 형통하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아 그분과 동행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식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해나감으로써 자신을 깨뜨리고 변화시켜나가야 한다.

영적성숙의 가장 큰 걸림돌은 태만이다. 태만은 알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태만에 빠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잘 것 없는 일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신앙은 형식적으로 굳어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쉽게 세상의 유혹에 빠져 무너지게 된다.

태만함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결단해야 한다.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른 신앙의 삶으로 서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둘째, 고통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들을 버려야 한다. 또한 그로 인해 다가오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 셋째, 잃어야 한다.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과감히 세상의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눈앞의 손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주어지는 축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처럼 태만함을 깨뜨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들을 누리게 된다. 또한 꾸준히 신앙이 성장되고 삶이 변화됨으로써 이 세대 가운데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