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된 유아기

작성자
표재근
작성일
2018-04-09 10:49
조회
2672
<고전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교회는 방언과 예언, 병 고치는 역사 등,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은 너희는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 같다고 말합니다. 비록 은사는 충만할지라도, 여전히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어리고 연약한 신앙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음을 질책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현대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많은 성도들이 연장된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연장된 유아기 상태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이 계속적으로 성장하여 장성한 신앙인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하지 못하는 신앙, 육신에 속한 신앙의 삶을 지속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의 삶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같은 연약한 삶의 모습을 반복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고, 자신을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연장된 유아기 상태에 있는 성도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변화시켜나가지 못합니다. 여전히 목회자가 대신 간구해주어야 하고, 여전히 젖과 같은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여러 사람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법을 알지 못하여, 항상 목회자의 양육을 받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여전히 연장된 유아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한 진정한 헌신의 역사들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측면의 헌신이 없습니다. 둘째,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헌신, 가족과 이웃을 위한 헌신, 국가와 민족을 위한 헌신, 나아가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중보의 헌신이 없습니다.

헌신의 삶은 영적으로 성장되어 있는 자들만이 가능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신령한 자들이고 성장한 자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들은 신령하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라는 말 한마디로 그들의 교만을 꺾어버립니다. 은사가 신앙의 성장의 척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입술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섬김과 헌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맺는 헌신의 열매는 우리가 얼마만큼 영적으로 성장되어 있고, 얼마나 신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게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노력은 곧 육신과의 싸움입니다. 많은 영적인 지식과 깨달음들은 육신의 삶을 통해서 열매를 맺을 때, 진정한 영성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영성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또한 우리의 헌신이 진정한 헌신인가, 자신의 유익을 위한 헌신인가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헌신은 주변 사람들을 감격시키고 소망을 갖게 하며, 새로운 변화의 삶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연장된 유아기 상태에 속해 있는 자들의 삶은 죄와 실패가 주관합니다.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죄악된 삶을 떠나지 못합니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인내하며 변화시켜가는 삶의 능력이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너무나 쉽게 상실하고, 너무나 쉽게 좌절하고 포기합니다.

눈이 많이 오던 겨울날,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의 가지하나가 부러졌습니다. 봄이 되어 많은 나무들이 잎을 내고 꽃을 피웠지만, 이 부러진 가지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나무의 꽃들이 다 질 무렵, 이 부러진 가지에 잎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아주 적은 부분 붙어있던 나무껍질을 통해 열심히 수액을 빨아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많은 잎은 내지 못했고, 많은 꽃은 피우지 못했지만, 이 부러진 가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식물도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주어질 경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원망하고, 너무 쉽게 삶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인들은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가능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끈질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넘어져버립니다.

장성한 신앙인들은 소망을 갖고 될 때까지 부딪혀보고 변화시키려 노력합니다. 인간의 시각으로는 0.01%의 가능성밖에 없을 지라도, 그 가능성을 파고들어 100%의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연장된 유아기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지 못하는 연약한 삶 가운데 있습니다. 눈 앞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며 좌절합니다. 지나온 삶에서 고통과 문제들을 해결해주셨고 변화시켜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기 위한 고통과 고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쓰러집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말씀과 은혜를 받았을 때, 그 말씀과 은혜로 인하여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어린 신앙인은 주어지는 말씀과 은혜에 만족을 경험하지만,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장성한 신앙인과 어린 신앙인의 차이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많은 은혜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자, 육신에 속한 자라는 책망을 들은 것은, 그들의 삶에서 변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고 많은 말씀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삶을 지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물질 때문에 힘들어하고, 여전히 남편과 부인 때문에 힘들어하고, 여전히 시어머니, 며느리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과 은혜를 통해 기쁨을 얻는 것에만 만족하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고통은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환경과 사람들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의 도구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신앙의 자세를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나가야 합니다. 말씀과 은혜를 통하여 변화되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들을 사랑하고 품어야 합니다. 불안과 염려를 버리고, 시기와 분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환경은 변화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어린아이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만, 성숙한 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욕구가 채워질 때 만족하고 기뻐하지만, 성숙한 자는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때 기뻐합니다. 어린 아이는 섬김을 받는 것을 기뻐하지만, 성숙한 자는 다른 사람을 섬겨주고 그들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참된 기쁨을 누립니다. 어린 아이는 연단의 과정에서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지만, 성숙한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견디어냅니다.

아직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삶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그 삶에서 탈피하여 성숙한 신앙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성경을 보고 묵상하며 삶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과 은혜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한 신앙의 결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의 삶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진정한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헌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변화되고, 우리의 직장과 사회가 변화되며,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