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신앙관
작성자
표재근
작성일
2020-06-22 18:51
조회
3474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올바른 신앙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올바르지 못한 신앙관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와 행함만을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인간적인 삶에 머물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교회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고 열심히 봉사함으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에 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라기보다 자신의 의와 행적을 드러내기 위한 인간적인 열심에 불과합니다.
상담과 내적치유전문가로 유명한 한 부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많은 세미나와 행사들을 개최합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자녀들은 부모들의 인기척에도 놀라 두려워합니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는 자녀를 돌아보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 부부가 행하는 상담과 치유는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심리적, 기술적 치유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통한 근본적인 영혼의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찬양단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를 준비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찬양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실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찬양은 단순히 귀에 듣기 좋은 노래일 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지만,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원망과 불평, 고통과 아픔만을 가져오는 육적인 일을 합니다. 올바른 신앙관을 통하여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신앙관은 잘못된 신앙의 가치체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기도에 대한 가치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기도에 대한 올바른 가치체계입니다.
교회를 깨끗이 하고, 장애인이나 무의탁노인들을 찾아가 닦아주고 보살펴주는 등, 봉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들에게 있어 봉사는 의무감에 의해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봉사에 대한 잘못된 가치체계를 가진 자들은 봉사를 하면 할수록 지치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전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전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가정을 소홀히 하거나, 믿지 않는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전도는 한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의 삶은 자신이 세운 가치체계, 즉 신앙의 형식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마음으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신앙의 본질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선한 행실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선한 행위는 언제든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으로 인하여 좋은 환경에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악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음으로써 우리를 미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조차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형성된 자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참고 견디며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어떠한 질병이나 물질적 어려움, 어떠한 고통이나 아픔도 딛고 일어서게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체계를 무너뜨리고,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무릎 꿇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어떠한 환경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들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믿음으로 움직여지는 삶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계획하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움직여나갈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좋아 행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의 찬양은 은혜가 되지 않으니 찬양을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이 청년은 찬양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찬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찬양이었고,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는 은혜로운 찬양이었습니다. 물론 성악적발성이나 전문적인 음악의 기준으로 보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에 치우쳐 믿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믿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던 그들은 아름다운 찬양을 시기하고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믿음을 따라 움직이지 않게 되면, 우리의 삶에는 정죄와 판단과 비판이 앞서게 됩니다. 만일 오늘 우리의 눈이 정죄하는 눈이고, 우리의 입술이 비판하는 입술이라면, 우리는 믿음을 좇아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형식에 치우쳐 죽어가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노력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는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일지라도 품을 수 있고, 정죄 받을 만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지치고 힘들지라도 먼저 움직여 섬기고 나누고자 하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많은 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신앙의 본을 보이게 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믿음의 삶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말씀들을 저버립니다. 하지 말라고 선포되는 말씀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들을 너무나 쉽게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믿음이 없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형제를 실족케하고도 죄의식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모든 잘못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는 삶, 전혀 변화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상대방이 우리의 마음을 격동시키거나 부당한 요구를 한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버리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죄의 근성들과 싸워 이김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고자 노력하는 믿음의 싸움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따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이 세운 가치체계, 즉 신앙의 형식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자신의 의와 행함만을 드러내려함으로써 많은 문제와 고통들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형식들을 깨뜨리고, 우리가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삶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에 따라 우리의 삶을 움직여가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따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무한한 감동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근성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을 좇아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계획하며, 모든 것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교회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고 열심히 봉사함으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반면에 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라기보다 자신의 의와 행적을 드러내기 위한 인간적인 열심에 불과합니다.
상담과 내적치유전문가로 유명한 한 부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많은 세미나와 행사들을 개최합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자녀들은 부모들의 인기척에도 놀라 두려워합니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신음하는 자녀를 돌아보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 부부가 행하는 상담과 치유는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심리적, 기술적 치유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통한 근본적인 영혼의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찬양단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를 준비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찬양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실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찬양은 단순히 귀에 듣기 좋은 노래일 뿐,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지만,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원망과 불평, 고통과 아픔만을 가져오는 육적인 일을 합니다. 올바른 신앙관을 통하여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신앙관은 잘못된 신앙의 가치체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기도에 대한 가치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이 기도에 대한 올바른 가치체계입니다.
교회를 깨끗이 하고, 장애인이나 무의탁노인들을 찾아가 닦아주고 보살펴주는 등, 봉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들에게 있어 봉사는 의무감에 의해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봉사에 대한 잘못된 가치체계를 가진 자들은 봉사를 하면 할수록 지치고 힘들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전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전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가정을 소홀히 하거나, 믿지 않는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전도는 한 영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의 삶은 자신이 세운 가치체계, 즉 신앙의 형식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마음으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신앙의 본질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선한 행실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선한 행위는 언제든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주어진 환경의 영향으로 인하여 좋은 환경에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악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음으로써 우리를 미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조차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형성된 자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참고 견디며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어떠한 질병이나 물질적 어려움, 어떠한 고통이나 아픔도 딛고 일어서게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체계를 무너뜨리고,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무릎 꿇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어떠한 환경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들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믿음으로 움직여지는 삶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계획하며, 믿음으로 모든 것을 움직여나갈 때, 우리의 삶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좋아 행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의 찬양은 은혜가 되지 않으니 찬양을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이 청년은 찬양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찬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찬양이었고,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는 은혜로운 찬양이었습니다. 물론 성악적발성이나 전문적인 음악의 기준으로 보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에 치우쳐 믿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믿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던 그들은 아름다운 찬양을 시기하고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믿음을 따라 움직이지 않게 되면, 우리의 삶에는 정죄와 판단과 비판이 앞서게 됩니다. 만일 오늘 우리의 눈이 정죄하는 눈이고, 우리의 입술이 비판하는 입술이라면, 우리는 믿음을 좇아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형식에 치우쳐 죽어가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노력들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될 때, 우리는 비판받아 마땅한 사람일지라도 품을 수 있고, 정죄 받을 만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지치고 힘들지라도 먼저 움직여 섬기고 나누고자 하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많은 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신앙의 본을 보이게 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믿음의 삶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말씀들을 저버립니다. 하지 말라고 선포되는 말씀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들을 너무나 쉽게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믿음이 없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형제를 실족케하고도 죄의식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모든 잘못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는 삶, 전혀 변화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상대방이 우리의 마음을 격동시키거나 부당한 요구를 한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버리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죄의 근성들과 싸워 이김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고자 노력하는 믿음의 싸움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따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이 세운 가치체계, 즉 신앙의 형식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자신의 의와 행함만을 드러내려함으로써 많은 문제와 고통들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형식들을 깨뜨리고, 우리가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삶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에 따라 우리의 삶을 움직여가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관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따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무한한 감동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근성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을 좇아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계획하며, 모든 것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들을 이루어 가십니다.